15  적외선 기술의 역사

1800년 이전에는 전자기 스펙트럼을 사용하는 적외선 기기의 출현을 생각지도 못 했습니다. 오늘날 열적외선의 한 형태로 적외선 스펙트럼 또는 간단히 '적외선'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본래 의의가 Herchel에 의해 발견되었던 1800년 당시보다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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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1  Sir William Herschel (1738–1822)‎

이러한 발견은 광학 물질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영국 왕 조지 III세의 궁중 천문학자이자 천왕성의 발견으로 이미 유명했던 William Herschel은 태양계 관찰 도중 망원경의 태양상의 밝기를 줄이기 위한 광학 필터 물질을 찾고 있었습니다. 밝기를 유사하게 줄여주는 여러 가지 색상 유리를 시험하다가 어떤 색상 유리는 태양의 열이 조금 투과하는 데 반해 다른 색상 유리는 열이 너무 많이 투과되어 몇 초의 관찰만으로도 눈에 손상을 줄 수 있음을 알게 되어 호기심이 일어 났습니다.
Herschel은 열을 최대로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밝기에 있어서도 원하는 만큼의 감소를 줄 수 있는 단일 물질을 발견하기 위해 체계적인 실험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뉴튼의 프리즘 실험을 반복해서 실험했을 뿐 아니라 스펙트럼의 시각적인 밀도 분배보다는 열 효과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는 수은 온도계의 구부에 잉크를 넣어 검게 하고 적외선 탐지기로써 사용하여 유리 프리즘을 통해 햇빛을 통과시켜 테이블 위에 형성된 스펙트럼의 다양한 색상이 가지는 열 효과를 시험하였습니다. 다른 온도계는 제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태양 광선을 미치지 않는 곳에 두었습니다.
검은 온도계를 스펙트럼 색상을 따라 천천히 이동함으로써 보라색에서 적색으로 조금씩 온도가 증가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탈리아 연구가,‎ Landriani가 1777년 유사한 실험에서 동일한 효과를 관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열 효과가 최대에 도달하는 지점이 있으며 스펙트럼의 가시 영역에 한정된 측정은 이 지점의 위치를 찾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허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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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2  Marsilio Landriani(1746–1815)‎

온도계를 스펙트럼 적색 끝 너머의 어두운 영역까지 옮긴 Herschel은 열이 계속해서 증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당시 최대 지점은 적색 끝 너머의 부분에 있었으며 오늘날 '적외선 파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Herschel은 자신의 발견을 발표하면서 전자기 스펙트럼의 새 영역을 '열 복사 스펙트럼'으로 명명했습니다. Herschel이 자주 '어두운 열' 또는 단순하게 '비가시 광선'으로 명명했던 자체는 복사 에너지입니다. 모순되게도 대중적인 의견과는 대조적으로 '적외선'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던 것은 Herschel이 아니었습니다. '적외선'은 약 75년 후에 활자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누가 정확하게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Herschel이 초기 그의 실험에서 프리즘에 유리를 사용함으로써 실제 적외선 파장의 존재에 대해서 그의 동시대 사람들과 몇 가지 초기 논의를 벌였습니다. 그의 연구를 확인하려는 시도에서 다른 조사자들은 적외선에 다른 투과성을 가지는 다양한 종류의 유리를 마구잡이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이후 연구를 통해 Herchel은 새롭게 발견된 열 복사에 유리의 투과성이 제한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적외선용 광학 기기는 적절하게 반사 요소(예: 평면 및 굴절 거울)‎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이것은 이태리 출신의 연구자인 Melloni가 본질적으로 자연 수정이 렌즈와 프리즘 으로 만들어 지기에 충분할 만큼 커다랗게 제공되었던 암염(NaCl)‎이 적외선에 분명하게 투과된다는 위대한 발견을 한 1830년까지는 사실로 입증되었습니다. 그 결과 암염이 기본 적외선 광학 재질이 되었고 인조 수정 배양 기술이 1930년에 보급될 때까지 그 후 약 10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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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3  Macedonio Melloni (1798–1854)‎

방사선 탐지기로써 온도계는 1829년 까지는 부동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해에 Nobili는 써모커플을 개발했습니다. (Herschel이 직접 개발한 온도계는 0.2 °C까지 읽을 수 있고 이후 모델은 0.05 °C)‎까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새로운 돌파구가 생겼고 Melloni는 일련의 몇 개의 열전대가 연결되어 최초의 열전대열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장비는 열 복사 감지에 있어서 오늘날의 최상의 온도계 만큼 약 40배 정도 민감하여 3미터 거리에 서 있는 사람에서 방출되는 열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최초로 '열화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1840년,‎ 적외선 발견자의 아들이자 유명한 천문학자인,‎ John Herschel경의 연구결과로 가능해 졌습니다. 집중된 열 패턴에 노출되었을 때 얇은 기름막의 차등 발산에 기초하여 열화상은 기름막의 간섭 효과가 이미지를 가시적으로 만드는 반사광에 의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John Herschel경은 또한 '열 측정 그래프'라고 그가 칭했던 최초의 열화상을 종이에 기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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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4  Samuel P. Langley (1834–1906)‎

적외선 탐지기의 민감도는 매우 느리게 향상되었습니다. 또 다른 주요한 발견은 1880년 Langley의 볼로미터의 발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적외선이 집중되면 민감한 검류계가 반응하는 휘스톤 브리지 회로(Wheatstone bridge circuit)‎의 한 쪽에 연결된 얇은 검은색 플래티넘 끈으로 구성됩니다. 이 기구는 약 400미터 거리에 있는 소에서 방출되는 열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 과학자,‎ James Dewar 경은 최초로 저온 연구에서 액화 가스를 냉각제(-196°C의 온도의 액화 질소 둥)‎로 도입했습니다. 1892년에 그는 액화 가스를 온종일 조정할 수 있는 독특한 진공 절연 용기를 발명했습니다. 뜨겁고 차가운 음료를 저장하는데 사용되는 '보온명'이 그의 발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900년과 1920년 사이에 세계의 발명가들은 적외선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특허권이 사람,‎ 무기,‎ 항공기,‎ 배 및 빙하 탐지기용으로 발행되었습니다. 현대적인 최초의 작동 시스템은 전쟁에 참여했던 국가들인 적외선의 군사적 이용에 전념했던 연구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던 1차세계대전(1914-18년)‎ 동안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에는 적 침투/감지,‎ 원격 온도 감지,‎ 보안 통신 및 '비행 어뢰' 감사를 위한 실험적인 시스템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실험되었던 적외선 검색 시스템은 약 1.5km(0.94mls)‎ 거리의 접근 중인 비행기 또는 300m(0.94mls)‎ 이상의 거리에 있는 사람을 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까지 구축된 가장 민감한 시스템은 모두 볼로미터 아이디어의 변형 형태에 기초한 것이지만,‎ 두 전쟁 사이의 기간 동안에 이미지 변환기 및 광양자 탐지기라는 두 가지 혁명적인 새로운 적외선 탐지기가 개발되었습니다. 처음에 이미지 전환기는 역사상 최초로 관찰자가 문자 그대로 '어둠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군사측에서 굉장한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미지 변환기의 감도는 근적외선 파장에 국한되었고 가장 흥미 있는 군사 대상체(예: 적군)‎는 적외선 검색 빔으로 방사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관찰자의 위치가 유사 장비를 갖춘 적의 관찰자에게 노출되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지 변환기에 대한 군사적 관심이 결과적으로는 시들해졌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소위 '능동적인'(예: 검색 빔이 장착된)‎ 열 이미징 시스템은 2차세계대전(1939–45)‎에 이어 광범위한 비밀 군사 적외선 연구 프로그램을 극도로 민감한 광양자 탐지기에 가까운 '수동적인'(검색 빔이 없는)‎ 시스템 개발의 가능성을 촉진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군사 비밀 규제는 완전하게 적외선 이미징 기술의 상태의 공표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이러한 비밀은 1950년대 중반에 서서히 막을 올리게 되고 그 때부터 적합한 열 이미징 장치가 마침내 민간 과학 및 산업에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